금화국민학교 ----------
본인이 다녔던 금화국민학교이다
1924년 4월 1일 죽첨공립보통학교 개교(설립인가 3월 7일, 4년제 6학급)
竹添普通學校
1938년 4월 1일 경성죽첨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경성죽첨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46년 4월 1일 서울금화국민학교로 개명
1976년 5월 17일 과학실 개설
1984년 6월 30일 전교실 영상 방송시설 완료
1986년 3월 1일 특수학급(2학급) 개설
1996년 3월 1일 서울금화초등학교로 개칭
1999년 12월 9일 본관 개축공사 준공
2000년 3월 1일 급식실 준공
2000년 4월 20일 도서관 개관
2004년 7월 14일 남관 과학실 현대화
2005년 4월 4일 교재원 조성 및 교수학습 지원센터 설치
2006년 11월 20일 옥상 자연학습장 설치
2009년 2월 1일 영어 전용교실 준공
2010년 3월 1일 신관 신축교사 준공
2011년 2월 21일 교사 휴게실 설치 공사
2011년 5월 17일 학교보안관실 설치
2015년 2월 13일 제89회 졸업식
2016년 2월 12일 제90회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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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과 2번은 건물양식이 비슷하다
1번이 먼저 건축하고 다음에 2번 건축돼었을것으로 추측
1번 건물은 일층이고 단순해서 건축기간이 일개월 이하일 정도로 가능할것 같음
본인이 1학년 교실로 쓰이던 곳이었음
3번과 4번은 건축양식이 비슷함 , 일제시대 맞는 시멘트 건축양식임
3번과 4번은 2층이상의 건축양식이 비슷한 구조이다
번호대로 다년간에 걸쳐서 건축돼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상은 일제시대 건축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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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5번 건물은 해방후 한국정부아래에서 건축돼엇을것으로 추측한다
건물양식이 확실히 다르다 ,
소변과 대변을 볼수 있는 변소들이 꽤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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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국민학교 다닐당시 어떤 여자아이 학생이 버드나무 근처를 가리키며 여기가 옛날 큰 연못이 있었다 고 말하면서
연못에서 용이 뛰어올라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흔히 있는 옛날이야기로 꾸며낸 이야기로 그냥 흘러 보냈는데
오늘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정말로 옛날에 연못이 있었다는 글이 상당이 있었다
음 그것이 소문이( 큰 연못 있었다 이야기) 아니었구나 여의주를 문 용 이야기는 물론 가짜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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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mirae_saram/221038655511
3. 서지(西池)
경기감영 자리를 지나 서대문 사거리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걸어가다보면 영천시장 못미쳐 현재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서지(西池)'라고 불리던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서지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서지의 원래 이름은 '천연지(天然 池)'로서 남대문 밖 남쪽에 남지(南池), 창경궁 동편 연동(蓮洞)에는 동지(東池)도 있었다고 하며
당시 우스개소리로 서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西人)이 득세하고 동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동인(東人)이 득세한다는 말이 있었다 합니다. 당시 치열했던 당파싸움을 조롱한 백성들의 유머일 것입니다.
또한 서지 옆 지금의 동명여중 자리에는 '천연정(天然亭)'이라는 호화로운 정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천연정은 조선 영조 17년(1741)에 세워졌으며 정자 앞에는 우산같이 펴져 있는 소나무,
즉 반송(盤松)이 서 있어서 '반송정(亭)'이라고도 하고 서지는 '반송지'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길은 시끄러운 자동차 길로 바뀌어 당시의 풍경을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당시 의주로 향하던 이들은 아름다운 연못과 정자를 보며
수개월 혹은 수년이 걸릴 아득히 먼 여행을 떠나는 허허한 마음을 달래고 다잡았겠지요.
천연정은 의주로 향하는 관원이나 귀빈을 환영 또는 환송하는 연회 행사장으로 활용되었으나 연회행사가 '모화관(慕華館)'으로 옮겨지면서 경기중군영 건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천연정은 고종 17년(1879)에 일본공사관으로 바뀌었는데 고종 20년(1882) 임오군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방치되다가 이 자리에 1924년 경성죽첨보통학교가 들어서고,
다시 1946년 서울금화국민학교로 바뀐 뒤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출처] [사람나래] 영광과 오욕의 길 - 의주대로 첫번째 이야기|작성자 인사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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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연(서울인문지리기행전문가)
그래서 안산의 동쪽 자락에는 중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모화관과 그 입구에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에 딸린 연못인 서지(西池)가 있었습니다.
모화관은 원래는 누각 형식으로 지어져 모화루(慕華樓)라 불렀으나 세종 때에 모화관으로 바꿔 불렀고 입구의 문은 원래 홍살문이었으나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의 건의에 따라 두 개의 기둥에 청기와를 덮어 격식 있는 문으로 거듭나서 영조문(迎詔門)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제안으로 영은문(迎恩門)이라 개칭하였으며
서지에는 개성의 숭교사(崇敎寺)의 연못에서 가져온 연꽃이 가득하였는데 이 터는 지금의 영천시장과 금화초등학교 일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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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연지동이라 한 것은 그 전에 지금의 남대문과 남대문로 5가 동사무소 사이에 큰 연못이 있고, 이 못의 연꽃이 특히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이 연못은 원래 남쪽 연못 또는 남지라 불렀는데,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13번지 금화국민학교 자리에 있었던 서쪽 연못과 대칭하여 부른 이름이다.
그런데 이 남쪽 연못은 조선조의 간신 김안로의 집터였다고 한다.
[출처] 중구 연지동|작성자 서울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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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공사관이 있던 동명여중
감리교신학대학 앞에는 동명여자중학교가 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개설한 첫 번째 주한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1880년 4월 이곳에 일본공사관을 마련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영조 때부터 경기중군영(中軍營)이 있던 곳이다. 경기중군영 내에는 천연정(天然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천연동이라는 동명(洞名)이 여기서 나왔다. 천연정은 서지(西池·지금의 금화초등학교 자리)라는 연못을 끼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은 흔히 청수관(淸水館)이라고 불렸다.
정식으로 공사관을 개설하기 전부터 강화도조약 후 서울에 들어오는 일본 사신들은 이곳에 묵었다. 이곳에 있던 일본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난민(亂民)들의 방화로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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